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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는 대상을 구분하고 관계를 설정하는 조건들이 작동하는 장소다. 경계는 단일하고 선명하며 영속적인 선으로 인식된다. 덕분에 세계는 인위적인 기준으로 쉽게 분절 가능한 대상이 되며 그래서 고정된 형태로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실제 세계는 연속적이고 혼종적이며 또한 끊임없이 변화한다. 경계 또한 그 위치가 언제나 흔들리고 수정된다. 따라서 세계는 경계로 완전히 고정될 수 없다. 경계의 조건은 가변적이고 잠정적인 체계 속에서 작동한다. 예를 들어 민족의 경계는 타자와의 접촉 속에서 반복적으로 다시 쓰여 왔다. 오늘날 젠더의 경계는 이분법적인 구분에서 벗어나 사회적 규범과 권력이나 문화적, 생물학적 조건에 따라 재편된다. 우리 앞에 놓인 예술 또한 마찬가지다. 예술은 고정된 장르나 매체의 구분을 벗어나 서로 다른 형식과 담론을 가로질러 왔으며, 예술과 비예술, 제도의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의 위치 또한 이동해왔다. 즉 경계가 세계를 나누는 선이 아니다. 경계는 세계를 구성하는 관계망 속에서 분리와 접촉, 배제와 환대가 교차하는 장소다.

 

따라서 경계는 단순히 내부와 외부를 나누는 선이 아니라 세계가 교차하는 장이며, 세계 또한 경계들의 교차들을 통해 드러난다. 교차하는 경계는 내부의 조건들을 흔들고, 내부와 이질적인 요소들과의 접촉 속에서 배제와 환대가 일어난다. 즉 교차하는 경계는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는 장소라는 점에서, 들뢰즈가 말한 외-부(out-side)의 힘이 작동하는 장소다. 외-부는 내외부의 구분을 넘어, 내부에 균열을 내고 사유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젖히는 장이다. 전시 <교차하는 경계>는 세계를 고정된 영역들로 구획하는 경계가 아니라, 변화하는 세계의 관계 속 힘들의 장소로서, 외-부로서의 경계에 대한 사유를 시도한다.

 

이번 전시 <교차하는 경계>는 조형적 세계와 현실세계가 접촉하고 갈등하며 서로 스며드는 물리적 경계의 장소로서 김아라, 심혜린의 조형작품들을 제시한다. 이를 통해 미술이라는 외-부의 힘들이 드러난다. 외-부로서의 미술은 현실세계와 교차하면서, 우리가 익숙하다고 여겼던 예술의 경계들을 흔들고 이를 다시 쓸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질문한다. 전시는 두 세계가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힘들의 장소다. 현실은 작가의 의식과 신체의 움직임을 통해 조형적 세계에 개입하고, 그 흔적인 물질로서의 표면은 다시 관객을 매개로 현실에 영향을 미친다.

 

심혜린의 회화는 물질적 형상들이 갖는 자율적 힘에 주목하게 한다. 회화 속 색과 형상은 작가의 통제에 따라 수동적으로 배치된 것이 아니라 조형적 요소들끼리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만들어낸 독자적인 질서를 따른 것이다. 《웅크리고 펼쳐낸》(2024), 《Trampolin》(2018)에서처럼 형상들은 무질서한 듯 보이지만, 서로가 맺은 관계들 속에서 전체화면은 오히려 안정적이다. 《어긋난 한복판》(2024)에서도 색채와 형상은 복잡한 듯 충돌하며 중첩되어 있지만 평평한 균형을 이룬다. 중심과 주변은 위계에 따라 분리되기보다는 화면 전체의 균형 안에서 공존한다. 크고 작은 색채의 덩어리, 날카로운 선과 부드러운 곡선, 스친 듯한 붓질과 겹쳐진 색면들은 얽히고 어긋나면서 표면에 끊임없이 감각의 균열을 만들어낸다. 화면은 혼란 속에서도 스스로 조화를 이끈다. 서로 연결되지 않는 익숙한 형상적 단서들의 자율적인 힘들이 관객에게 감각적 충돌을 일으킨다.

 

작가는 즉흥적이고 비계획적으로 작업하지만, 화면 위 흔적들은 우연적이지 않다. 회화는 화면 속 요소들이 발휘하는 자율성과 생동하는 힘에 따라 완성된다. 조형요소들은 작가의 다음 결정을 이끌어낸다. 작가는 화면을 구성한다기보다는 물질들과 협업한다. 이는 사물이 지닌 활기에 대하여 논의한 제인 버넷의 사물-권력thing-power의 개념과 상응한다. 베넷에게 사물은 수동적 대상이 아니라 고유한 힘을 발휘하며, 인간과 비인간, 신체와 환경을 매개하는 능동적인 존재다. 심혜린의 회화 속 형상들 또한 마찬가지다. 하나의 조형요소가 다음 붓질의 조건이 되고, 이내 또다른 색의 층위를 불러들인다. 다시 서로에게 얽히고 밀어내는 형상들의 긴장관계가 전체로 확장되어 화면의 생성조건을 갱신한다. 관객은 현실과 조형세계의 접면에서 물질의 자율적인 힘이 회화의 조건에 개입하여 발생시킨 틈에서 새로운 시각적 감각들의 가능성과 만난다.

 

김아라는 전통적인 건축의 색채와 구조를 기하학적 질서의 조형언어로 옮기고, 화면의 물리적 구조와 건축적 요소들을 교차시킨다. The Frame(2024)과 untitled(2023)같은 입체조형 작업들에서 작가는 캔버스의 나무 프레임을 해체하고 조립하여 재구성한다. 회화적 요소들은 틀 표면의 채색으로, 심지어 The Frame에서는 모서리의 측면의 채색으로, 밀려나거나 비워진다. 그동안 가려져 있던 회화의 기반 구조는 조형 오브제로 전환된다. 평면을 지탱하는 하부구조가 역전되면서 분리된 모서리의 형태는 평면회화의 폐쇄성을 해제하고 경계 기능을 전복한다. 캔버스 프레임의 파편들이 한옥 구조물의 형태를 구성하면서 회화와 건축의 구조적 질서가 교란된다. 그 표면에서 변주된 패턴과 채색은 다시 건축적 회화적 구조와 질서를 연상시킨다. 이들은 표면에서 충돌하면서 다시 구조적 긴장감을 공간에 만들어낸다. 건축과 회화, 구조와 표면, 내부와 외부의 구조가 교차하면서 물질은 조형적 힘으로서 작동한다.

 

또한 김아라는 회화작업에서 단청의 색과 비례, 건축적 균형, 색채와 모듈을 추상적 화면의 구성에 끌어들인다. 이는 단순한 인용이라기보다는 회화 내부에 외부의 질서를 불러들이는, 구조적 개입에 가깝다. 전통적인 색의 물질성과 구조적 리듬은 기억 속 전통건축으로부터의 익숙한 공간 감각들을 불러온다. 이는 기하학적 추상의 안정된 배치가 만들어내는 회화적 리듬과 교차하면서, 이질적이고 낯선 감각들의 화면을 드러낸다. 표면 위 조형요소들은 더 이상 회화 내부의 조건에 머무르지 않는다. 건축적 구조와 교차하면서, 화면 밖 현실세계로 감각의 영역이 확장된다. 회화의 경계를 흔드는 외-부의 힘이 작동하면서, 관객을 경계의 영역에 세운다.

 

<교차하는 경계>는 두 작가의 작업을 통해, 경계를 고정된 선이 아니라 서로 다른 체계가 맞닿아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장소로 드러낸다. 심혜린의 회화가 물질적 형상들의 자율적 힘을 통해 내부를 흔들어 균열을 발생시킨다면, 김아라의 작업은 전통 건축과 회화적 구조의 접면에서 감각들을 교란한다. 전시는 미술의 경계 너머 외-부의 장에서, 현실과 조형세계가 서로 스며드는 공간을 드러낸다. 관객은 이 경계의 틈 앞에 서서, 사물-권력으로서의 조형 작품들이 여는 새로운 감각과 사유의 가능성과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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